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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23일
어떤 만남

급하게 일을 보느라 하루 종일 런던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저녁무렵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패딩턴 역이었나. 열차가 고장났으니 다른 선로로 오는 다음 열차로 모두 옮겨 타라는 방송이 나왔다. 다음 열차는 절반쯤 비어서 오던 터라 일을 마치고 피곤한 기색의 사람들이 가방이나 짐을 아무렇게나 의자 위에 올려 놓고 있다가 갑자기 선행열차의 승객이 합류하자 부랴부랴 가방을 치우고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런던 지하철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평소같으면 그냥 서서 가겠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빈 자리를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비닐봉지 꾸러미 몇 개와 가방을 옆 좌석에 올려 놓고 중국어신문을 보던 아저씨가 이리저리 짐을 치우길래 아무 생각없이 자리에 앉았다.

자기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짐이 좀 많았던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등 뒤 창틀에 짐 일부를 올려 어렵사리 고정시키고 나더니 나에게 국적을 묻는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짧은 영어로 한국 휴대폰 좋다고 말을 건네는 50대로 보이는 중국 아저씨. 혹시 중국어 할 줄 아냐고 그래서 조금 한다고 그랬더니 직업이 뭐냐, 어디 사냐,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냐, 중국 가 봤냐...등등으로 시작한 별 다를 것 없는 대화. 내 성격에 평소 같으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만 하고 말 텐데, 오늘은 왜인지 내 쪽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내게 되었다. 中醫라고 자기 직업을 먼저 밝혀서였을까.

북경에서 중의학원을 졸업하고 학교 동창인 아내와 함께 의사생활하다가 친구 권유로 처자식들 놔두고 런던으로 떠나 온 지 8년 되었다는 이 아저씨. 지금은 해머스미스에서 중의원을 하고 있고 아내도 함께 살고 있지만, 나이 들어서 시작한 타향살이라 처음에는 혼자 외로웠고 아직도 말이 잘 늘지 않는다고 푸념한다.

지하철에서 처음 본, 이름도 모르고 국적도 다른 50대와 30대의 사내 둘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동시에 상대의 손을 움켜쥐며 몸 조심하라는 작별인사를 나누다니. 나는 내가 왜 그 아저씨의 손을 잡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나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 by damekana | 2008/04/23 08:34 | Merton Hous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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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ato at 2008/04/23 15:06
서양사람들 속에서 동양 3국인들이 더 친밀감을 느끼는 탓일까요.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4/23 15:49
고향 땅의 향수가 인간을 뭉치게 만드나 봅니다.
Commented by damekana at 2008/04/23 23:50
Cato 님 / 그런 부분도 작용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단순히 인종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잘 설명을 못 하겠군요.

나츠메 님 / 그렇지요. 서로 다른 고향 땅에 대한 향수이긴 하지만. 그런데...제가 고향 땅 (저에게 그런 게 있다면...)에 대한 향수를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
Commented by joyce at 2008/05/20 17:47
굳이 말하자면 자신이 이미 써버린 인생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왠지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근데 글이 좋아서 저렇게 열어 놓는 것도 좋아 보이고.
Commented by damekana at 2008/05/20 19:09
역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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